하회에서도
북촌의 중심에 자리잡은 북촌댁은
단순히 집이 커서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1797년(정조21)에 처음 건물이 세워진 뒤 1862년(철종 13)에 제 모습을 갖추게 된 북촌댁은 2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흐트러짐없이 온전히 옛 모습 그대로 강건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북촌을 지키며 하회의 긍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Noblesse Oblige를 실천하며 살아 온 선비의 기상과 지조가 오롯하게 살아있는 곳이 바로 북촌댁입니다. 저잣거리의 간단한 눈요기로 변해버린 전통문화가 아닌 사람들과 함께 살아 온 삶이 담겨있는 전통문화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북촌댁은 2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옛 모습 그대로 입니다. 구들 개자리를 넘나드는 불길이 아랫목을 덥힙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돌의 저릿한 온기를 몸에 담아둘 수 있습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위원인 주손으로부터는 전통가옥에 대한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북촌댁 역사

이 건물은 정조·순조 조에 초계문신과 예조·호조 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의 선고(先考)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柳師春)공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처음 건립하였다.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은 경상도도사를 지낸 그의 증손 석호 류도성(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북촌댁은 석호 류도성 공의 별호(別號)인 수신와(須愼窩 : 모름지기 수, 삼갈 신, 움막 와 : 어려운 이웃을 의식해 언제나 삼가면서 겸손하라는 뜻)정신을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학서 류이좌

류이좌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의 맏이로 1763년(영조 39년)에 태어났다. 향년 75세로 1837년(헌종 3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字)는 사현(士鉉)이고, 호는 학서(鶴棲)이다. 1794년(정조 18년) 정시병과에 급제 및 규장각 강제문신(초계문신)에 발탁되었다. 정조, 순조대에 걸쳐 뛰어난 학식과 수많은 덕행으로 각별한 신임을 받고 주요관직을 수임하였다. 동지경연의금부사(同知經筵義禁府事), 가선대부도총부부총관(嘉善大夫都摠府副摠官), 예조,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조로부터 초명 태조(台祚)에서 나를 더욱 도우라는 뜻의 나‘이’(台), 도울‘좌’(佐)로 개명을 하사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번암 채제공의 의리를 신변하는 내용의 “천휘록(闡揮錄)”, 초계 당시의 강제문과 정조의 은유(恩諭)를 수집한 “백세운결록(百世隕結錄)”,“금강록(金剛錄)”,“기송록(記誦錄)”,“공경(恭敬)”, 문집 20권 10책 등이 있으며, 순조 23년 채제공 “번암집”간행, 순조 31년 문장공 우복 정경세의 연보를 간행하였고 헌종 3년 퇴계문집을 중간할 때 주간자를 역임하였다. 또한 종형제들과 같이 의장소(義庄所)라는 조직을 구성,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고 동네 노인에게 세찬을 드리는 등 불우이웃돕기와 경로사상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석호 류도성

류도성의 자는 선여(善汝)이고, 호는 석호(石湖)다. 수신와(須愼窩)·송만(松灣)은 별호이다. 1823년(순조 23년) 12월 28일에 태어나 일찍부터 호학호문하였으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 향촌에서 후학을 육성하며 영남일대 유림 사회의 영수급으로 지내다가 1882년(임오년) 당시 영의정 홍순목의 추천에 의해 경상도사를 역임하였다.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향년 84세로 1906년(고종 10년) 7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류도성은 을해년 집을 짓기 위해 양질의 춘양목을 강변에 적재 건조 중에 있던 중, 마을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상갓집에 조문 갔다 오던 일가 수십 명이 탄 배가 홍수로 전복되고, 또한 인근 동네에서 떠내려오던 목숨이 경각에 이른 많은 수재민을 구하기 위해 재목 일부는 강물에 뗏목으로 밀어 넣어 붙잡고 살게 하고 나머지는 불을 질러 어둠을 밝혀 수많은 목숨을 구하였다. 류도성은 이후 어렵게 재목을 다시 구해 현재의 집을 지을 수 있었으며 당초의 재목으로 건축하였더라면 건축연도가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1895년(을미년)에 단발령이 공포되고 왕명을 받은 칙사가 내려와서 유림 사회의 영수가 단발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따를 것이라며 단발을 강요하자 목숨을 바칠지라도 머리는 깎을 수 없다는 추상과 같은 반론에 그대로 물러갔다 한다. 농민전쟁이라고 사가들이 일컫는 갑오 동학난 때에도 동학군(소작민)을 맞이하고도 무사했던 것은 지주로서 소작인에게 얼마나 후덕했던가를 증명하는 일이라 하겠다. 1905년(을사년) 83세 때 나라의 국치를 들으시고는 매국노 5명을 처단하라는 “을사오역토소”상소를 올려 울분을 토하였으며 독립활동에 많은 재산을 쾌척하고 의병활동에 참여 지휘장을 맡아 여러 문중의 힘을 단합하는데 진력하였다. 류도성의 도량과 인품을 엿볼 수 있으며 사사로움을 버리고 대의를 택함으로써 동민과 영남 일대 유림으로부터 더 한층 칭송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류도성의 고손이며 화경당 8대 종손인 류영하(柳永夏, 字 : 夢擧)는 서울중앙고보 재학 때 학우들과 5인 독서회를 만들어 독립 쟁취와 민중 조직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1년 5학년때 항일유격대와 해외 유학생들과의 연락 활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100일간의 옥고를 치루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1961년에 경북 영덕군수를 역임하였다. (참고 : 안동판독립사, 김을동 편집,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 정세현 저)

쌍벽가

북촌댁을 소개하는데에 있어서 규방가사 “쌍벽가(雙璧歌)”를 빼놓을 수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규방가사 중 작자, 연대, 장소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학술적으로 고증된 가사가 바로 쌍벽가이다. 1794년(정조 18년, 갑인년) 4월 초 1일 안동 하회에서 창작되었으며 총 9개 문단, 327구로 구성된 본 가사의 작자는 초계문신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의 자당(慈堂) 정부인(貞夫人) 연안이씨(延安李氏, 1737~1815)로 서애 류성룡 의 8세손인 류사춘(柳師春, 1741~1814)의 처다. 정부인 이씨가 1794년 58세 때 장자 학서 류이좌와 그의 종형(從兄) 류상조(柳相祚)가 동년동학(同年同學)으로 공부하여 나란히 과거에 나아간 결과 류상조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류이좌는 정시병과(庭試丙科)에 합격하여 종형제가 나란히 그 해 여름에 하회 본댁에 도문(到門)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쌍벽(雙璧)이라 일컫고 지은 것이 곧 쌍벽가이다.

내용은 먼저 성은을 감사하고 도문의 경사를 말하면서 가문 자랑과 하회의 경치를 말하고 나서는 만약 종형이 되고 아우가 안되었던들 형의 마음이 어떠했겠으며, 반대로 아우가 합격되고 종형이 안되었더라면 아우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는 등 명문장으로 꾸며져 있다. 전문을 읽어보면 참으로 유려한 문장으로 엮어진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참고 : ‘규방가사연구’, 효성여대 교수 권영철 박사 저) 상기와 같은 기록들을 보면 화경당은 검소, 후덕, 대의로 일관한 가운과 가풍으로 7대 200여 년 동안 학문, 벼슬, 재산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 정신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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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유거

가장 윗어른인 할아버지께서 거주하시던 사랑으로 간혹 외빈 접객용으로도 사용되었던 북촌유거는 정면 7칸, 측면 3칸 건물로 2칸 방 2개, 1칸 방 2개, 4칸 대청, 3칸 누마루, 3칸 규모의 정지와 그 위에 같은 크기의 다락, 그리고 5칸의 퇴, 5쪽의 쪽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누마루에 앉으면 하회마을의 3대 풍광을 동시에 볼 수 있는데 정면 동쪽으로는 하회의 주산(主山)인 화산(花山)을 마주하며, 북쪽으로는 부용대와 낙동강을, 남쪽으로는 남산과 병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화경당

경제권을 가진 바깥주인이 기거하던 사랑이며 화경당 편액은 정조, 순조조에 초계문신과 예조, 호조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공의 당호로 가족과 친족 간에 화목하고 임금과 어른을 공경하라는 뜻이며 충효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뜻이다.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수신와

손자가 기거하던 곳으로 사랑 중 가장 작은 규모이다. 방 오른쪽에는 어린 손자가 안채의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중문을 통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도록 조그만 문을 달아 배려했음을 엿볼 수 있다. 수신와 현판은 어렵게 사는 이웃을 의식해 언제나 삼가면서 낮추어 살라는 화경당 북촌의 정신으로 어릴 때부터 방을 드나들 때마다 쳐다보고 일깨우라는 어른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북촌유거를 쓴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안채

안채는 서북쪽 모서리에 4칸의 큰 부엌을 두고, 이의 동쪽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안방을 두었다. 안으로는 4칸으로 나뉘어 마치 함경도지방의 田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부엌 쪽 전면 1칸이 안방이고, 이의 북쪽 1칸은 의걸이 등을 놓아두는 곳이며, 동쪽 전면방은 안방의 윗방이다.

사당/문간채

사당은 출입문은 삼문이고,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격식을 갖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문채는 1칸의 대문칸, 곶간 3칸, 가마칸 2칸, 마굿간 1칸 등 정면 7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대문칸은 솟을 대문이다. 외벽 아랫도리는 돌로 막쌓기 하였고, 그 위에 흙벽을 치고 표면에 와편을 가지런하게 쌓아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웅장해 보이도록 했다. 대문 앞면 양쪽에는 쌍희(囍)자를 양각하여 격을 높였다.

탱화산/별당

북촌댁의 후원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탱자나무가 있어서 탱화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후원 뒤의 공간은 원래 딸들이 살던 안별당이었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이 건물이 존속이 되었더라면, 99칸 집이었으나 지금은 72칸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