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도성의 자는 선여(善汝)이고, 호는 석호(石湖)다. 수신와(須愼窩)·송만(松灣)은 별호이다. 1823년(순조 23년) 12월 28일에 태어나 일찍부터 호학호문하였으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 향촌에서 후학을 육성하며 영남일대 유림 사회의 영수급으로 지내다가 1882년(임오년) 당시 영의정 홍순목의 추천에 의해 경상도사를 역임하였다.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향년 84세로 1906년(고종 10년) 7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류도성은 을해년 집을 짓기 위해 양질의 춘양목을 강변에 적재 건조 중에 있던 중, 마을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상갓집에 조문 갔다 오던 일가 수십 명이 탄 배가 홍수로 전복되고, 또한 인근 동네에서 떠내려오던 목숨이 경각에 이른 많은 수재민을 구하기 위해 재목 일부는 강물에 뗏목으로 밀어 넣어 붙잡고 살게 하고 나머지는 불을 질러 어둠을 밝혀 수많은 목숨을 구하였다. 류도성은 이후 어렵게 재목을 다시 구해 현재의 집을 지을 수 있었으며 당초의 재목으로 건축하였더라면 건축연도가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1895년(을미년)에 단발령이 공포되고 왕명을 받은 칙사가 내려와서 유림 사회의 영수가 단발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따를 것이라며 단발을 강요하자 목숨을 바칠지라도 머리는 깎을 수 없다는 추상과 같은 반론에 그대로 물러갔다 한다.
농민전쟁이라고 사가들이 일컫는 갑오 동학난 때에도 동학군(소작민)을 맞이하고도 무사했던 것은 지주로서 소작인에게 얼마나 후덕했던가를 증명하는 일이라 하겠다.
1905년(을사년) 83세 때 나라의 국치를 들으시고는 매국노 5명을 처단하라는 “을사오역토소”상소를 올려 울분을 토하였으며 독립활동에 많은 재산을 쾌척하고 의병활동에 참여 지휘장을 맡아 여러 문중의 힘을 단합하는데 진력하였다.
류도성의 도량과 인품을 엿볼 수 있으며 사사로움을 버리고 대의를 택함으로써 동민과 영남 일대 유림으로부터 더 한층 칭송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류도성의 고손이며 화경당 8대 종손인 류영하(柳永夏, 字 : 夢擧)는 서울중앙고보 재학 때 학우들과 5인 독서회를 만들어 독립 쟁취와 민중 조직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1년 5학년때 항일유격대와 해외 유학생들과의 연락 활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100일간의 옥고를 치루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1961년에 경북 영덕군수를 역임하였다. (참고 : 안동판독립사, 김을동 편집,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 정세현 저)